12월 26일은 내가 그 누구보다 사랑하는 외할머니의 기일이다. 우리 할머니의 이름은 영희이다.
내가 어떤 모습이든 무한히 나를 사랑해 주는 존재. 언제나 자신감과 확신을 주었던 존재. 지금의 내 모습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존재. 세상을 떠난지 1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가장 보고싶은 존재이다. 나의 인생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같은 공간에서 보낸 사람 또한 할머니다. 지금도 가끔 많이 외로울때면 할머니가 나한테 주었던 사랑들을 곱씹어본다. 내가 모르는 사이 내가 생각하는 방식이나 취향 또한 그녀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오늘은 많이 보고싶은 할머니가 나에게 남긴 유산들을 정리해본다.
일(work)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할머니는 최선을 다해 바빴던 가족을 서포트했다. 막내였던 엄마는 선생님이 되고 싶어 형제 자매 중에서 유일하게 대학교를 졸업했다. 엄마는 외가의 가난 때문에 국립대학교의 상대적으로 저렴한 학비도 낼 수 없었다. 결국 4년 내내 장학금을 받아가면서 어렵게 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누구나 인정하는 하드워커 선생님이 되었다. 엄마는 나를 낳고 한달만에 복직했다. 엄마가 고흥으로 발령을 받았을때엔 얼굴을 제대로 본 기억이 없다.
학교 운동회나 각종 행사에 부모님은 거의 오지 못했고 종종 할머니가 왔다. 할머니는 내향적이기도 하고 나이차가 많이 나서 주변의 엄마들과 잘 어울릴 수 없었다. 어느 운동회 날, 선생님들이 할머니를 배려해주어 할머니는 교사 좌석에 앉았다. 운동장 정중앙의 교사 좌석에서 나에게 웃어주던 할머니 모습이 생생하다.
할머니는 엄마가 일을 하는게 몸이 힘들 수는 있겠지만 행복해 보여서 좋다고 했다. 엄마가 쉰다면 대학생때 새벽같이 고생하면서 공부했던 걸 포기하는거라 아깝다고도 했다. 할머니는 가난으로 인해 꿈이 많았던 막내에게 못해준게 많다고 아쉬워했다. 그래서인지 엄마가 일에 열중하던 시간들을 최선을 다해 지원해 주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나도 할머니처럼 본인의 일에 열중하는 엄마의 모습을 항상 존중하고 좋아했다.
큰 강아지와 마당이 있는 시골 별장
부모님이 주말에도 바쁜 상황이 있었던 터라 할머니와 단 둘이 오랜 시골 생활을 하게 되었다. 할머니의 집은 시골 마을에 있었는데, 작은 마당과 백구라는 큰 하얀색 시골개가 있었다.
할머니는 마당엔 각종 작물들과 꽃이 있었다. 꽃들의 느낌과 파란색 하늘, 흰 강아지 백구가 할머니 집의 초록색 대문과 잘 어울렸던 기억이 있다. 나는 몸집이 큰 백구를 많이 좋아했다. 마루에서 백구를 베고잤다. 백구는 내가 잠이 깰때 귀신같이 알아채고 같이 깼다. 할머니가 바쁠때면 우리는 슈퍼도 같이 갔고 근처 초등학교 운동장도 같이 갔다. 친구가 없던 시골에서 백구는 나의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다.
덕분에 나는 큰 강아지와 마당 있는 집에 대한 로망이 있다. 언젠가는 제주 산간에 이런 별장을 장만하려고 한다.
따뜻함과 차가움의 조화
할머니는 주말이면 볼일을 보러 시골에 있는 할머니의 ‘진짜 집’에 잠시 다녀왔다. 할머니가 없는 주말은 엄마아빠와 함께 보내곤 했다. 엄마아빠와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기에 나와 부모님이 서로를 이해하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내가 부모님의 모습을 존경하는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부모님은 내가 혼자 있고 싶을때 같이 있고 싶었고 내가 같이 있고 싶을땐 쉬고 싶었다. 그래서인지 주말이 항상 즐거운 건 아니었다.
할머니가 돌아오는 일요일 밤이면 나는 으레 할머니를 현관문 앞에서 기다리곤 했었다. 할머니는 예상 도착시간에서 10분 이상 차이나는 법이 없었다. 버스를 타고 여수까지 오곤 했던 할머니에게 안기면 바깥 공기에 차가워진 할머니의 겉옷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자주 입었던 모피 목도리의 차고 푹신한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모피의 느낌은 방바닥의 따뜻함과 묘하게 대조되면서 기분 좋은 느낌을 주었다.
나는 아직도 따뜻한 바닥과 찬 옷감이 대비되는 상황, 그리고 차가운 목도리를 좋아한다.
책을 읽는 습관
어렸을때 책을 많이 접하게 된건 할머니의 영향이 크다. 할머니는 성경책이나 각종 책을 읽곤 했다. 오후에 학교에서 돌아오면 할머니가 빨래를 개켜두고 쇼파에 앉아 몇 백번은 더 읽었을것 같은 성경책을 읽던 모습이 기억난다. 친구들도 학원에 가고 가끔 게임마저 지루해지면 나는 할머니 옆에서 자연스럽게 책을 꺼내 들었다.
할머니와 나는 서로 다른 책을 보면서 1~2시간 동안 말없이 앉아있곤 했다. 가끔 신기한 주제가 나오면 할머니에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녀는 항상 나의 모든 말을 주의깊게 들었다. 난 이 시간을 좋아했지만 그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시간에 맞춰서 집안일을 다시 시작했다.
쉴 때마다 글을 가까이했던 할머니 덕분에 책을 많이 읽는 습관을 자연스럽게 기를 수 있었다.
가끔은 라떼를 마신다
가끔 어렸을 때 잠에서 깨서 다시 잠을 못들때가 있었다. 그럴때는 보통 운동회나 소풍이 있는 날이었다. 할머니는 내가 잠에서 깬걸 기가막히게 알아냈다. 그리고 이럴때면 그녀는 우유를 따뜻하게 손수 데워서 주었다. 신기하게도 할머니의 따뜻한 우유를 먹으면 30분 안에 잠이 들었다.
따뜻한 우유의 좋은 기억 덕분에 안정이나 전환이 필요할 때는 아메리카노나 오늘의 커피가 아닌 따뜻한 라떼를 먹는다(우유만 먹을수도 있지만 카페인 없이는 살기 쉽지 않으므로..)
기독교에서 떠나다
할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영생을 믿었다. 외할머니는 본인이 세상을 떠나면 육체는 무의미하니 화장해달라고 말하곤 했었다. 돌아가신 후 할머니의 몸은 그렇게 넌덜머리를 내셨던 외할아버지 옆에 묻혔다. 할머니가 좋아하는 장소도 아닐 뿐더러, 영생을 믿는 그녀의 신념대로 나는 외할머니의 산소에 간 적이 없다. 하늘에 있는 그녀는 내가 산소에 가는 모습을 좋아할 것 같지 않았다. 그 세계관에서 할머니는 지금 천국에서 행복할 것이므로.
누구보다 진심으로 기독교를 믿었던 할머니는 제사 등 각종 전통 의례에도 큰 관심이 없었다. 명절에 외가에 가면 그 흔한 차례상도 없었고 성묘도 없었다. 외가의 이 모습은 친가와 사뭇 대비되었다. 며느리 역할을 하는 여성들을 보며 여성으로서는 외할머니의 세계관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나의 외가에서는 여성들이 할 일이 많지 않았으니까.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서서히 기독교를 내려놓았다. 대세를 따르지 않았던 할머니의 관점으로 기독교를 보니 오히려 불만이 생겨났다. 교회들은 내가 좋아하는 신념과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다. 다양한 삶의 방식을 포용하지 않는 것, 조금만 교회가 크면 새로운 건물을 짓는 것 등 종교로서의 의미가 퇴색되었다고 느꼈다. 기독교는 할머니가 젊었을 때는 진보적인 종교였지만 나의 세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종교였다. 고등학생 때부터 서서히 난 기독교에서 멀어졌다.
덜 꾸며도 나쁘지 않다
할머니는 없지만 그녀는 여전히 내가 사는 방식에도 여전히 영향을 미친다. 내가 화장에 큰 관심이 없는건 할머니 영향이 크다. 명품에 관심이 없는 것도 할머니 영향이 크다. 할머니는 그 흔한 화장대도 없었고 꾸미는데도 큰 관심이 없었다. 할머니의 영향으로 엄마도 화장대가 없고 명품에도 관심이 없다.
종종 꺼내보는 사진속의 그녀는 신기한 매력들이 있다. 할머니 나이 답지 않게 167cm로 큰 키와 호리호리한 몸매, 파마기가 거의 없는 숏컷, 그리고 다른 할머니들이 좀처럼 입지 않는 무채색 혹은 덜 화려한 옷을 입고 있다. 어느 사진에서나 할머니는 편안하게 웃고있다.
이런 할머니와 지내면서 자연스럽게 덜 꾸며도 나름 살만 하다는 것을 배운 것 같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심플하게 산다’라는 책 후기를 쓰는 것으로 한번 더 이야기해보고 싶다.
할머니와의 이별
할머니는 내가 중학생이 된 후 시골집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할머니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진 만큼 시골집에서 밭일을 하다가 쥐에 물렸다. 그 이후 쯔쯔가무시라는 병에 걸려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할머니는 무사히 회복했지만 이걸 계기로 더 무서운 병을 앓게 되었다. 바로 알츠하이머였다. 나는 할머니에게서 이상 징후를 느끼고 있었다. 원래 패턴과는 다르게 그녀는 케이크를 냉장실이 아닌 냉동실에 넣어두었고 결국 케이크는 얼음이 되어버렸다 (한창 썸을 타던 친구에게 받은거라 속상해서 케이크의 모양까지 기억에 남아있다..). 이외의 이상 징후들도 많아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중학생의 마음에서는 금방 사라졌었던것 같다.
그 후 반 년 정도가 지났다. 할머니와 LPG가스를 주문하러 시골길을 걷고 있을 때 였다. 가게 앞에 다 왔을때 할머니는 ‘우리 왜 여기 있지? 집에 얼른 돌아가자’라고 했다. 나는 산책의 목적이었던 LPG를 주문하지 않고 다시 돌아가야하는 영문을 몰랐다. 번뜩 할머니가 치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결국 알츠하이머로 진단받았다.
그 후 할머니는 빠르게 악화되어 8년을 알츠하이머로 고생하다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말년엔 나를 잘 알아보지 못했다. 영혼은 이미 할머니의 바람대로 천국에 가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막상 돌아가셨을때는 마음을 정리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할머니의 투병이 시작되며 눈에서 초점이 서서히 없어질 때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할머니와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유한하다는게 힘들었다. 할머니한테 더 잘했어야 했다. 왜 그때 나만이 알 수 있었던 사건들을 그냥 넘겼는지 마음이 아팠다. 다른 사람들은 다 바빴었기 때문에 내가 좀 더 신경을 써야 했었다. 그랬다면 할머니는 온전한 영희로 6개월은 더 지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아픔은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라는 세계관을 믿은 후에도 없어지지 않는다.
할머니가 많이 보고싶은 연말이다.
혬 쾌활한 성격 뒤에는 온화한 할머니가 있으셨군요! 글이 좋아서 몇번을 읽었습니다. 다음 글도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