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때부터 경쟁심이 대단히 많았다. 나의 이 경쟁심은 타인에 대한 경쟁심도 있겠지만 스스로의 바(bar)를 높게 설정해 놓고 그것을 착실히 수행&기록하는 것도 포함되었다. 어렸을 때 게임을 하면 승률이나 뱃지, 혹은 레벨 같은것에 집착하였고,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피아노 연습시간을 꼬박꼬박 기록하는 일 따위에 몰입하곤 했다. 내가 짱이고 내가 열심히 살고 있고, 나는 역량 있는 사람이라는걸 스스로에게 (또는 세상에게) 증명하고 싶어했다. 물론 지금도 이런 성향이 강하게 남아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전자기기 중 하나가 애플워치이다. 구매를 할지 말지 굉장히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옆에서 보다못한 지인들이 그냥 지르라고 해서 작년 8월에 샀었다. (미안. 그 때 고민한 것에 비하면 너무 잘 쓰고 있어. 대만족이야!)
애플워치는 나의 성향에 매우 잘 맞았다. 나의 취향에 맞는 워치 화면을 꾸밀 수 있었고, 그때 당시 한참 하고 있었던 F45 운동 칼로리를 잴 수 있게 해 주었다. 나는 특히 건강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애플 워치 기록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나의 건강 인사이트가 늘어났다. 몇 걸음을 걷는지, 칼로리는 얼마나 소비하는지, 심박수는 어디까지 올라가는지 등등..
애플워치를 사자마자 가장 짜릿했던 건 바로 뱃지 획득이다. 애플워치를 맨 처음 작동 시키면 운동 목표를 설정하라는 메세지가 나온다. 운동 목표는 ‘운동 시간’과 ‘서있는 시간’, 그리고 ‘소모 칼로리’이 세가지로 이루어졌다. 이 목표 세 가지를 모두 일정 시간동안 달성하거나 새로운 운동 따위를 하면 뱃지를 획득할 수 있었다.
내가 세팅한 운동 목표는 매일 F45와 같은 고강도 운동을 적어도 1회를 하는 것 뿐만 아니라 시계를 계속 차고 있어야만 달성할 수 있었다. 고강도 운동 할때만 시계를 차고 있었거나, 시계는 계속 차고 있었지만 고강도 운동을 안했다면 목표는 달성할 수 없었다. 이 기록을 위해서 애플워치를 잠들기 전까지 차고 있었다. 심지어, 이 모든걸 다 해도 목표 소모 칼로리가 10칼로리 정도 채워지지 않았을때 그 10칼로리를 채우기 위해 일부러 자기 전 집 안을 걸어다니기도 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통계는 ‘유산소 운동 강도’라는 숫자였다. 내 연령대 보다 유산소 운동 강도를 많이 하는 편이었는데, 그 통계를 보는게 뿌듯했다. “맞아, 나는 잘하고 있어. 그럼 빨리 늙지도 않을 거고 건강도 유지할 수 있을거야. 왜냐면 평균보다 더 많이 하고 있으니까” 따위의 생각으로 흐뭇해하곤 했다.
그러다 최근에 이런 일이 있었다. 내가 1년 반 넘게 다니던 F45 지점이 문을 닫게 되어서 다른 F45 지점을 찾는 2주 정도 헬스장을 다닌다. 아무래도 F45 만큼의 효율적인 고강도 운동을 하기는 어려웠다. 그 결과 애플 워치를 계속 차고 있어도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날이 생겼다. 잠들기 전에 워치를 보면 목표 달성까지 50~100칼로리 정도가 남아있곤 했다. 살짝 화가 났다. 난 분명히 똑같이 시간을 내서 운동을 했는데 왠지 잘못 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50~100칼로리를 채울만한 무언가를 하고 잘 시간이 부족해 찝찝한 마음으로 잠이 들곤 했다.
답답한 상황이 반복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떻게 하면 워치 목표를 다시 달성할 수 있을지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 보려고 했다. 계속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12월의 뱃지를 받지 못할 것이다. 운동 시간을 늘려볼까? 쉽지 않을것 같았다. 아니면 워치를 차고 잘까?
해결책을 생각하다가 이 생각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내가 외부 요인으로 인해 빡센 운동을 연말까지 하기 어려운 상황은 변함이 없었다. 2주 정도 고강도 운동을 못한다고 하더라도 애플워치가 뱃지를 주는 궁극적인 목적인 ‘건강 관리’에 뒤쳐지지도 않는다. 워치에 기록된 숫자는 내려가겠지만 나는 기존처럼 틈틈이 운동을 하면서 체력을 지키고 있기 때문. 연초부터 다시 F45 지점을 찾아 운동한다고 해서 2주간 운동을 못했다고 장기적으로 건강이 손상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연말 까지는 다른 연계 F45지점에 가서 운동할 수도 있다.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외부 상황으로 나의 루틴이 변경된건 아쉬웠지만 그렇다고 언제나 모든 상황이 동일할 수는 없다. 외부 상황으로 목표 달성이 어렵고, 목표를 달성하려고 웨이트 시간을 늘려버리면 일하는 시간이나 내가 쉴 시간이 단기적으로 줄어들 수도 있다. 그건 대표로서 맞지 않는 선택이다.
생각이 확장되다 보니 애플워치를 잠들기 전까지 계속 차고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애플워치는 0) 일단 내가 애플워치 차는걸 좋아하고, 1) 시간을 알 수 있게 해주고, 2) 나는 핸드폰이 항상 무음이기 때문에 전화가 오면 빨리 받을 수 있게 해주고 (다른 앱은 워치에 없어서 전화 외 알람은 받지 않는다), 3) 건강 관리에 도움을 준다. 가끔 4) 애플 페이도 사용할 수 있게 해 준다.
뱃지를 획득하는것에 대한 욕심만 내려 놓는다면 새벽부터 일어나서 워치를 바로 찰 필요가 없지 않을까? 새벽부터 집에서 워치를 차고 일하면 가끔 손목에 걸리적거리는 느낌 때문에 불필요하게 신경이 쓰일때가 있었다. 애플워치를 목적에 맞게 쓰려면 출근할 때나 운동할 때, 아니면 친구들을 만날 때 차면 되었다.
이 생각까지 이른 후, 이번 뉴욕 여행때 간만에 만났던 친구와의 대화가 생각났다. 집착하지 말 것,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 것. 기록 때문에 굳이 행복할 시간도 부족한 내 인생에서 조그만 스크래치도 허용하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맞아. 그럼 시계를 밖에 나갈 때만 차야지. 기록에 집착하지 말아야지.
이 생각에 이른것이 지난 주 주말이었다. 기록에 대한 집착을 푼 이후 일주일 간 나는 아무일도 없이 잘 지낸다. 시계를 집에서 풀고 있으니까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했다. 덜 구속받는것 같고, 신경써야 할 한 가지가 줄어든 것 같고. 마치 일주일 전 핸드폰에서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앱을 지워버렸을 때 느낀 작은 해방감과 비슷했다. 어차피 밖에 나갈때는 차고 가니까 목적에는 맞게 사용하고 있다. (집에서 전화를 놓치는건 단점이긴 하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저 멀리 충전기에 얹어진 애플 워치를 본다. 내가 좋아하면서도 내가 원할 때 쓸 수 있다. 워치가 더 예쁘게 느껴진다. 삶의 주도권이 조금 더 생긴 느낌도 든다. 맞아. 너는 내가 리딩하고 있어. 내가 내 삶의 주인이지. (라고 생각하며 기계를 대상으로 참 이상한 생각을 한다는 현타도 왔다ㅋ)
나의 워치 집착증세에 대해 잔소리 했던 뉴욕 친구에게 메일을 써야겠다. 나 워치 이제 밖에서만 찬다고. 그리고 고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