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은 고가의 와인에 대한 경험과 이해가 매우 부족하며, 아래의 와인 경험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마음만 먹으면 쉽게 접할 수 있는 와인에 집중되어있다.
연말이 되니 와인이 여기저기 자주 보인다.
와인과 나는 2년째 잘 지내고 있다. 2020년 말부터 와인에 1년 정도 깊이 빠졌었다. 가까운 사람이라면 ‘임혜민=와인 공부중’이라는걸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와인은 허세라는 생각이 있어 가까이 하지 않았던걸 고려할때 와인이 내가 즐기는 주종 중 하나가 된 상황이 신기할 따름이다.
와인을 시작하다
코로나 한가운데를 지날 때였다. 여느 스타트업 대표들이 그렇듯이 쌓인 스트레스를 리셋하고 싶은 날이 있었다. 운동/친구들 만나기 등으로 풀곤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어느하나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꼭 스트레스를 해소해야 한다는 생각에 조용한 술집을 찾기 시작했다. 마침 상수 쪽에 톤 다운된 고동색 인테리어와 심플한 메뉴 구성이 돋보이는 와인바를 발견했다. 술을 한두잔만 먹어도 되는 곳이라는 소개에 끌리기도 했고, 코로나가 극심할 때 오픈했다는 것도 사장님의 도전정신을 증명하는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 와인을 하나도 몰라 살짝 걱정이 되었지만 바깥공기를 쐬고 싶어 일단 가보기로 했다.
우연히 만난 샤도네이(Chardonnay)
와인은 뭘 주문해야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어 추천을 받았다. 단(sweet) 술은 좋아하지 않고, 묵직한걸 좋아한다는 것 정도만 말씀 드렸더니 몇 가지를 추천해 주셨다. 그 때 귀에 쏙 들어왔던 단어가 ‘샤도네이(Chardonnay)’라는 품종이었다.
샤도네이라는 단어가 크게 들어왔던 이유는 마침 자주 들었던 팝 Lizzo의 Juice(=매력)라는 노래 덕분이었다. 나는 해리 스타일스(Harry Styles)가 부른 버전을 훨씬 더 많이 들었는데, 그가 노래할때 느껴지는 귀여움과 단단함, 자신감 그리고 본연의 매력들이 가사와 묘하게 잘 어울렸기 때문이었다.
이 노래를 들으면서 몰랐던 단어가 등장했는데, 바로 ‘샤도네이’였다. 덕분에 샤도네이가 와인을 만드는 포도 품종의 하나라는건 은연중에 미리 알게 된 셈이었다.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맛있어지는 샤도네이라고 할수 있지.
I’m like chardonnay, get better over time
노래 가사가 바로 겹치면서 샤도네이를 주문했다. 그 이후 숱한 와인에 도전했지만 이날 마신 샤도네이보다 맛있는 와인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 아직도 샤도네이는 만원짜리를 마셔도 대부분 맛있다.
*그 날 마신 샤도네이는 웬티(wenti)의 모닝포그 샤도네이(Morning Fog Chardonnay)였다.
지금 그날을 돌이켜보면 운이 정말 좋았었다. 자주 듣던 노래 덕분에 최애 와인을 만난건 아직도 신기하다. 수많은 종류의 와인 중 TPO에 무관하게 정말 좋아하게 되는 와인은 만나기 힘들다는 걸 이해했기 때문이다. 우연은 쌓이고 쌓여 하나의 취향을 완성한다.
축적을 통해 쌓인 와인이라는 세계관
그 이후 와인은 코로나로 밖에 나가지 못하던 나에게 하나의 좋은 탈출구가 되어주었다. 2020년에는 주말에 2~3시간 정도 시간을 내어 중저가 데일리급 샤도네이는 대부분 시도해본 것 같다. 이외에도 화이트/레드, 대륙을 불문하고 다양한 와인들을 접했다. 과음하거나 피곤한 날에도 그 맛을 곱씹고 분류를 마친후에 잠들었다. 호기심에 다음 주말이 기다려졌다.
*1주일에 1병 씩은 꼭 알아가보기로 계획하고 주말에 시간을 정해 각종 자료를 챙겨봤다. 매주 토요일 저녁에는 신중하게 고른 와인을 먹었다. 약속이 생기면 거리두기 핑계로 파인다이닝이나 와인 타파스바로 유도했다. 친구 집에 놀러가더라도, 친구들이 놀러와도 와인과 함께했다.
시간이 흐르며 전통이 축적된 와인이라는 세계관은 내 호기심을 끊임없이 자극했다. 와인이 전파되며 그 지역의 음식과 품종에 맞는 와인이 발달한다. 와이너리가 추구하는 숙성방식, 블렌딩, 생산된 연도의 기후, 전반적인 떼루아에 따라서도 맛이 조금씩 달라진다. 너무 다양하기 때문에 사람마다 좋아하는 와인도 다 다를 수 있다는 점이 매력이다. 마치 개인의 세계관이 다 다른 것처럼 말이다.
와인들을 다양한 경우의 수와 체계에 맞게 분류해보고 맛있는 음식들과 페어링하고, 가끔은 사회 문화적인 지식을 쌓아간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몇백년 이상 유지-확장되는 전통의 위대함도 사뭇 느끼게 되었다. 이 후 클래식한 것들이 더욱 좋아졌다.
* 와인이 좋은 다른 이유들도 있었다. 수많은 경우의 수에서 내 취향에 딱 맞는 와인을 찾으면 그 추억과 짜릿함이 매우 오래간다는 점, 음식을 천천히 생각하고 음미하며 먹는 시간을 갖게 된다는 점이 좋았다. 물론, 아직 와인 초보로서 모든 와인을 전혀 다 이해하지 못했다. 아마 1% 정도 이해했다고 하면 알맞을 것 같다.
완벽함을 추구할수록 완벽과는 멀어진다.
와인에 대한 지식이 쌓일수록 더 취향에 맞는 와인을 찾기 위한, 내가 알고있는 카테고리를 더 늘리기 위한 고려사항들이 늘어났다. 와인을 마실수 있는 시간이 한정적인 반면 구매가 고민되는 와인의 종류가 너무 많았다. 하루는 밤에 있을 모임에서 어떤 와인을 페어링할지 끝없이 고민중이었다. 문득 후회 없는 완벽한 선택은 불가능하단 생각이 들었다. 고민할수록 투자한 시간대비 효용을 잃게 되는 것 같았다. 그 와인이 그 와인이라는 생각과 함께.
중학생때의 수업 내용도 생각났다. 길이와 오차에 관한 이야기였다. 아무리 정밀한 줄자라도 물체의 순수한 길이를 재는 건 불가능하다. 모든 줄자에는 오차가 있기 때문이다.
순수한 절대값은 존재하지만 그 근처에 0.1%, 0.01%, 0.001%등으로 점점 더 가까워지는건 큰 의미가 없다. 만약 cm 단위로 재도 큰 문제가 없다면 그렇게 하고, 정밀한 단위가 필요하면 mm로 재면 된다. 우리는 그냥 그 줄자에 나온 오차값만 믿어도 생활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
더 좋은 와인 선택지를 고민하던 시간들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 돌아보았다. 1년간 와인을 틈틈히 공부했지만 나의 최애 와인은 처음 그날의 그 샤도네이였고, 그 와인이 어떤 음식과 잘 어울리는지, 그 와인을 대체할 수 있는 초이스들도 잘 알고 있었다. 욕심을 내려놓으면 오늘 저녁에 준비된 음식에 80% 정도 맞는 와인을 즉시 떠올릴 수도 있었다. 나 보다 훨씬 더 오래 와인을 공부한 전문가가 있는 와인샵들도 알고 있었다. 문득 평소 좋아하던 삼겹살과 소주, 치킨과 맥주를 즐기지 못하고 있었던 사실도 깨달았다.
그 날이 분기점이 되어 나는 새로운 와인에 도전하고 그들을 분류하고 완벽한 페어링을 고민하는데 집착하지 않게 되었다. 와인을 마시는 횟수도 1달에 많으면 1회 정도로 크게 줄었다. 가장 중요한건 와인과 음식을 100% 이상 즐기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위스키나 칵테일도 알아가게 되었지만 더 나은 선택지를 탐색하려고 시간을 더 투자하진 않는다. 더 좋은게 있다면 언젠가는 알게될 것이다. 물론, 몰라도 상관없다.
이제는 좋은 친구가 된 와인
그렇지만 내가 느끼는 와인의 매력이 감소한건 아니다. 어쩌다 와인 약속이 있으면 괜히 하루가 즐겁다. 이제는 식당에서 준비된 와인리스트를 즐긴다. 준비해 가야할 상황이라면 자주 가는 가게에 가서 추천 받은 대로 구매한다.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을 때보다 맛있을때가 훨씬 많다. 좋아하는 와인은 셀러에 여러개 넣어두고 즐기고 싶을때 꺼내가는 여유도 생겼다. 아직도 좋아하는 와인 리스트는 큰 틀에서 변하지 않는다. 더 나은 발견을 위해 집착했던 때가 무색할 정도다.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 자체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도 더 다양한 주종들을 즐길 수 있기를!
샴페인 한두잔 기울이고 싶은 크리스마스다🎄
부록: 두번 이상 찾았던 와인들
- 화이트
- Morning Fog Chardonnay – Wenti
- Gran Reserva Chardonnay 2016 – Morande
- Court Rollan Premium White Blend – Vina Casas del Toqui
- Lumiere et Craie Blanc de Blancs Brut Champagne – Jean Velut
- Cava Vintage Reserva Brut Nature – Maset del Lleo
- 레드
- El Padre 2018 – Morande Adventure
- Le Puy Chinon 2018 – Jean-Mauirce Raffault
- Chinon Rouge 2018 – Jean-Mauirce Raffault
- Court Rollan Carmenere 2018 – Vina Casas del Toqui
- Palermo Cabernet Sauvignon 2015 – Orin Swift
- Pinot Noir 2013 – Three Saints
P.S. 처음 와인을 입문했던 상수의 그 가게는 지금도 영업 중이다. 1년정도 가보지 않아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다. 이번 겨울이 가기 전에 한번 가봐야겠다.
하여튼 샤르도네 좋아하네
연초에 샤블리 한번 가시죠
“완벽함을 추구할수록 완벽과는 멀어진다.” 이 말을 들으니 와인에 대해서 느끼던 거리감이 가까워지는거 같아요!!
여전히 공부해야지 더 알게 되는 것들은 어렵긴 하지만.ㅋㅋ
ㅋㅋㅋㅋ 와인 집착할때가 생각나는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