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은 외할머니의 기일이다. 2년 전에도 그녀를 회상하며 글을 썼었다. 시간은 참 빠르다.
부모님이 일 하느라 현실적인 육아 시간이 부족했을때 외할머니는 나와 동생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주었다. 덕분에 나는 강한 부모님과 따뜻한 할머니 사이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자랐다. 할머니가 매일 있을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언젠가 집에 온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하곤 했다.
할머니는 똑똑했다. 그 당시 초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한글을 자유롭게 읽고 쓸 줄 알았다. 그래서인지 내가 학교에서 배운걸 한참을 이야기하면 그녀는 조용히 듣다가 연결된 질문들을 던지곤 했다. 조용한 집에서 햇빛을 받으며 할머니와 수다를 떠는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 중 하나였다.
그녀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나와 동생, 그리고 엄마를 위해 항상 기도했다. 그녀가 새벽에 일어나 성경책을 읽으며 하루를 준비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할머니의 든든한 우산 아래 있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 분위기가 좋아서 옆에 앉아 괜히 책을 꺼내 읽기도 했었다.
할머니는 나를 할머니의 방식대로 강하게 키우기도 했다. 할머니는 내가 할머니의 단어로 ‘부잡’했던 탓에 친구랑 싸우거나 브레이드 따위를 타다가 크게 다쳐서 오면 약은 혼자 바르고 관리하게 했다. 약을 혼자 바를때는 조금 서러울 때도 있었지만 한번 익숙해지니 곧 잘 했다. 공부를 하지 않는건 전혀 신경쓰지 않았지만 머리 옷 매무새나 예절, 청결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했다. 인생 공부가 더 중요하다고 수차례 이야기하면서.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는 학교가 외지에 있었던 탓에 입원해 있는 할머니를 자주 보러 갈 수 없었다. 하루는 할머니가 너무 보고싶어서 담임 선생님께 할머니 보러 다녀오겠다고 하고 광주로 무작정 버스를 타고 갔었다. 일본어도 할 줄 알았던 그녀는 내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NHK 뉴스를 보고 있었다. 교복을 입은 나를 보고 하염없이 안아주던 그녀가 생각난다. 할머니와 나는 이제 더 자주 못볼 현실을 직감해서 한참 눈시울이 빨개진 채로 있었다.
할머니의 기일이 12월 26일이라 우리 외가는 항상 크리스마스에 모여서 식사를 한다. 크리스마스에 눈을 뜨면 엄마가 보낸 ‘가족 모임’ 소식에 할머니 기일이 자연스럽게 리마인드 된다. 엄마는 이맘 때면 ‘할머니 잊지 말아야 해’ 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엄마, 할머니를 어떻게 잊어’라고 한다. 정말이지 난 그녀를 결코 잊은적이 없다.
오늘 엄마의 전화를 끊고 나니 할머니가 더 크게 생각났다. 할머니는 그렇게 원했던 천국에 가있을까. 천국이 있다면 나를 생각할까. 할머니가 지금 내 모습을 보면 정말 좋아할텐데. 단 10분이라도 주어진다면 그녀의 모습을 다시 보고 싶다. 할머니 장례식에 할머니 시골 교회 목사님과 친구분들이 오셨었다. 할머니와 같이 시골에서 유년시절을 보냈어서 그 분들을 바로 알아봤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때도 울지 않았었는데, 그 분들의 얼굴을 보니 어렸을때 시골에서의 할머니와 추억들이 생각나 눈물이 쏟아졌다. 할머니를 잃었다는게 실감이 났다.
그녀가 힘든건 지나가니까 너무 힘들어하지 말라고 하던게 생각난다. 요즘 많이 버거워서 더 생각나는 걸까. 오늘 따라 할머니가 정말 많이 보고싶다. 할머니, 천국에서 건강해야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