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까지만 해도 약속이나 미팅이 꽉 차있어서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다. 들여다봐야 할 아젠다들이 많았었지만 해결되는게 없는 것 같은 마음에 대체적으로 불안했다. 많은 일들이 손에서 빠져나가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허슬러의 성격에 일을 치기만 하고 있으니 우울할 때도 많이 있었다.
해외에서 일주일 정도를 보내며 급한 일들을 집중해서 쳐냈다. 인터넷이 가끔 느릴 때가 있어 의지와는 상관없이 상대적으로 우선순위가 아닌 일들은 뭉갰어야 했다. 귀국해서는 손에서 빠져나와 줄줄 흐르는 미룬 일들을 에라 모르겠다 라는 심정으로 리더들에게 위임했다 (위임하지 않으면 답이 안나오는 상황이었다..). 일이 살짝 줄었다.
이번주에 평일 저녁 약속이나 미팅을 빙자한 술자리가 거의 생겨 있지 않았다. 처음 가보는 새로운 환경에 있어서 나도 지인들을 찾지 않았고, 지인들도 잘 쉬다 오라며 나를 찾지 않았다. 해외에 있다보니 저녁 시간을 최대한 빼기 위해 업무 연락을 먼저 처리하는게 최우선순위가 되었고 카톡 답장도 자연스럽게 매우 느려졌다. 그러다보니 팔로업 약속이 자연스럽게 줄었다.
일요일 밤에 가만히 앉아 평일 저녁 시간이 듬성듬성 비어있는 주간 캘린더를 보니 신기했다. 저녁 약속이 있는 날엔 7시 에 나가야되는데..라는 생각에 마음이 급할때가 많았다. 반면 이번주는 마음이 급하지 않으니 팀원들에게 짜증도 확실히 덜 내게 되었다. 예상하지 못한 감정소모를 처리할 시간도 있었고 회의가 길어지더라도 ‘이따 남은 일을 더 하면 되지’ 라는 생각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 더 많은 아젠다들을 처리했다.
스트레스를 주는 상황들은 전보다 훨씬 많았지만 감정 처리가 원활해졌다. 여유가 상대적으로 부족했을때 감정 처리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난 왜 또 이랬을까’, ‘이 상황은 왜 또 발생하는 걸까’라며 화가 났지만 이번엔 ‘내가 짱인데 뭐 어쩔꺼야. 지금 처리하고 잊어버려야지’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운동도 최근엔 집중하기 어려웠지만 이번주는 주어진 시간 만큼은 대체적으로 최선을 다할 수 있었다. 애플워치에 기록되는 심박수나 운동량이 서서히 높아졌다. 몸의 텐션이나 기분 좋은 근육통도 다시 올라오는게 느껴진다. 요즘 띄엄 띄엄 배우는 골프도 차분하게 교정 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예전엔 시간 안에 개선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불편하곤 했었다. 희한했다. 투자하는 시간은 비슷하지만 마음의 여유가 생기니 오히려 같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했다. 맞아. 골프는 여유를 가지고 A/B 테스트를 해야한다.
근무 시간은 오히려 길어졌다. 귀가 시간은 같지만 약속이 없으니 사무실에 더 오래있었다. 좋은 점이 있다면 내일 봐야할 아젠다를 정리하고 퇴근할 시간이 생겼다. 다음날 일에 대한 압박을 훨씬 덜 받으니 기상 시간을 5시, 6시로 칼같이 지킬 필요가 없었다. 중간에 계속 깨곤 하지만 늦게 일어나니 절대적인 수면 시간이 길어졌다. 차가 막히기 전에 빨리 가야지라는 생각으로 꽉 차있었던 아침이 달라졌다. 막상 7시에 일어나서 출근해도 차가 그렇게 막히지 않았다. 많으면 15분 정도 차이가 났는데 Youtube에서 내가 좋아하는 채널들을 라디오 처럼 들으면서 출근하니 오히려 자기계발 시간을 따로 투자하여 생산적인 아침을 보낸 느낌이었다.
토요일에 습관처럼 출근해 이런저런 일들을 들여다보며 문득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은 분명히 컴퓨터 앞에 앉아있지만 느긋하게 이런저런 지표들을 확인하면서 (쫄리지만..) 그래도 다음주에 어떤 소통을 해 봐야겠다, 여기까지는 리더들이 치고 나갈 수 있도록 이런 부분은 지원해 줘야겠다, 이건 내가 들여다 봐야겠다 등의 우선순위에 대한 관점이 훨씬 뚜렷해졌다.
내가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는 슬랙 채널들의 메세지를 천천히 다시 읽을 시간도 있었다. 메세지들을 들여다보면서 리더들이 많이 고생하고 있고 목표를 맞추기 위해 능동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모습들이 보였다. 그래 나는 너무 모든걸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구나.
이상하기도 했다. 회사 상황이 긍정은 아니지만 평온했다. 뭔가 더 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회사를 반등 시킬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더 생겼다.
연락을 자주 못했던 친구들에게도 전화할 여유가 생겼다. 어떻게 지내는지 이것저것 묻다가 서로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메뉴에 정말 정말 잘 어울리는 술을 한잔 하면서 캐치업을 하기로 갑자기(!) 정해졌다. 간만에 친구를 볼 생각에 설명할 수 없이 기분이 좋고 설렜다. 땅굴 속에서 나가는 곰 같은 기분도 들었다. 평소 친구들에게 신논현이나 강남/선릉이 아니면 보기 어렵겠다고 말하곤 했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여유가 있는 내가 가도 되겠다 싶었다. 이번엔 내가 판교로 가겠다고 했다. 친구는 꽤 놀라는 눈치였다. 자기중심적인 임혜민이 여기 온다고?
비도 많이 오고 술도 한두잔 할 예정이라 차를 두고 신분당선을 탔다. 신분당선은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 가는 길에 읽으려고 책을 하나 챙겨왔지만 앉을 수가 없어 독서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좋아하는 음악을 듣기로 했다. 음악을 듣자니 금새 판교역에 도착했다. 계획한 책을 읽을 수 없어도 기분이 좋아서 이상했다.
친구와는 너무 좋은 시간을 보냈다. 사시미에 시원한 도쿠리를 한 잔씩 했다. 자리를 이동해서 평소 좋아하는 글렌모렌지 4종(오리지널, 라산타, 넥타도르, 퀀타루반)을 집중해서 탐험하고 맛을 토론했다. (너무 좋았다. 글렌모렌지는 넥타도르가 아직까진 제일 맛있다). 그 외에도 서로 스타트업 하는 이야기, 문화 생활 이야기, 운동 이야기 등을 나눴다. 평소에 내가 이런저런 일들을 통해 깨달았던 이야기들도 나누었다. 이야기하다보니 최근 우리 회사 상황도 더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몇가지 떠오르는 생각을 메모했다. 살짝 취한 상태여서 그런지 크트에 대한 엄중한 메모인데도 즐거움이 꽉꽉 차있다. 판교는 사람들이 북적이지 않아서 더 조용하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판교역으로 오는데 친구가 “너 이렇게 많이 웃는거 처음 본다”라고 했다. 나도 그런것 같았다. 맞아 즐거웠어! 고마워.
역설적으로 바쁘지 않으니 더 많은 것에 집중할 수 있다. 에너지는 더 쓰는것 같지만 더 중요한 일과 더 중요한 사람들이 보인다. 더 단단해진 느낌이다. 앞으로도 삶을 지금처럼 단순하게 살아가고 싶다. 이게 더 좋다. 행복하다.
아 나 결국 잘될 것 같아!
ㅋㅋㅋ 필드 언제 나가지?
칠 줄을 알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