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간만에 이사를 했다. 사무실도 이전하고 통근은 점점 불편해지고 기존 집 계약이 끝나가는 상황이 잘 맞물렸다. 이사할때 가장 최우선순위는 회사와의 접근성, 그리고 한적한 동네였다.
우선순위를 정했으면서도 시간에 쫓겨 집을 제대로 알아볼 겨를도 없이 정신이 없었다. 주말에 시간을 쪼개 부동산에 왔다갔다 했지만 정작 집들을 다 세세히 들여다봤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긴 연휴를 앞두고 인터넷도 이전신청을 하지 못해 연휴간 테더링으로 연명한 것은 비밀..
집을 개떡처럼 알아본 것과는 별개로, 운 좋게도 이사한 이후에 소소하게 많은 것들이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가장 큰 변화는 출근시간에 대한 압박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회사와 가까우니 집에서 풀로 일하다가 출근하는 것도 가능했다. 기존 집과는 거리가 멀어서 차가 막히기 전 출근해야 한다라는 압박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 압박에서 완전히 벗어나 내 생활 패턴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일하다가도 졸리면 원래는 ‘다하고 자야 내일 출근하지’ 였다면 지금은 ‘내일 일어나서 바로 새벽에 내 방 책상에 앉으면 된다. 일단 졸리니까 자자.’의 마인드셋으로 바뀌었다. 만약 지하철이나 버스 시간이 애매하다면 전기자전거나 퀵보드를 타면 15분 내 사무실에 도착할 수 있다는 점도 맘에 든다. 시간에 대한 여유가 생겼다.
좋아하는 것들과 가까워지기도 했다. 일단 와인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졌다. 이사 전에는 시간을 내서 방문해야만 했던 와인 프랜차이즈가 가까워졌다. 예전 집 주변에도 하나 있긴했지만 걸어서 40분 이상이 소요되서 차를 끌고 방문해야 했다. 때문에 미리 사둬야한다는 강박때문에 과소비를 하거나 오히려 한 두잔 하고 싶을때 알맞는 와인이 없을 때도 있었다. 지금은 10~13분 이내에 가까운 지점이 있어서 간단히 한두잔 하고 싶을 때 퇴근 길에 들를 수 있다. 이 샵은 소품종 다량 유통을 원칙으로 해서 1~2만원대에도 충분히 좋은 데일리 와인들을 만날 수 있다 (광고 아님..).
생각나는 와인 한 두병을 사서 사갈 수 있는 주전부리들도 주변에 꽤 많이 생겼다. 예전에는 대형 마트까지 어렵게 가야했었다. 지금은 주변에 작은 샵이나 작은 마트들이 많다. 치즈도 있고, 하몽도 있고, 크래커도 있고, 간단한 과일들도, 냉동식품(만두!!!)도 가볍게 사서 들어갈 수 있다. 회사 일로 지쳤는데 생각을 완전히 비우고 싶을 때나 천천히 하루를 곱씹어 보고 싶을 때, 급한일이 없다면 사온 와인을 오픈하고 좋아하는 주전부리를 조금씩 먹으면서 쉴 수 있다. 술이 느는건 단점인것 같다..
에슬레저(?) 브랜드들이 주변에 많이 있는것도 좋다. 최근 일의 숫자는 줄어들었지만 하나하나의 강도가 높아졌다. 이에 운동만이라도 부여잡으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자라고 다짐했다. 운동을 적어도 하루에 한 번씩은 하다보니 운동복이 빠르게 마모된다. 산책가능한 거리에 좋아하는 운동복 브랜드 샵들이 있어서 인터넷을 떠돌아 헤멜필요 없이, 아울렛에 날 잡아서 갈 필요 없이, 언제든 필요할 때 짧은 시간을 들여 쇼핑이 가능하다.
F45와도 가까워졌다. 예전엔 주말에 운동을 하려면 차를 끌고 나와서 운동하고 다시 주변 카페나 사무실에 어렵게 가서 일을 하곤 했었다. 지금은 걸어서 40분 거리에 F45가 있다. 주말 아침에 산책 겸 걸어서 운동하러 가는 기분이 참 좋다. 운동 후에도 걸어서 집에 온다. 천천히 샤워를 하고 나와서 내 방 책상에 앉으면 시원한 바람이 느껴진다. 가을이라서 그런지 더 좋다. 주말 뿐만 아니라 평일에도 시간 능률이 많이 오른다. F45에 들렀다가 퇴근해서 바로 다음 일을 할 수도 있다. 예전엔 항상 밖에서 때우고 주변 카페에서 일하거나 다시 사무실에 들어가야해서 능률이 오르지 않는 기분이 들었었는데, 지금은 집에와서 천천히 저녁을 먹고 퇴근하면서 아낀 시간으로 다시 일을 할 수 있어 너무 좋다.
이번에 이사하면서 평수가 넓어진 것도 전체적인 만족도와 능률을 올려 준다. 가구의 숫자는 변한게 없다. 더 작은 평수에 살 때도 짐이 거의 없었고 가전 제품들도 아담했다. 친구들은 우리집의 슬림한 냉장고와 2인용 밥솥을 보면서 놀라곤 했다. 몇 년 전에 ‘심플하게 산다 (the art of simplicity)’ 책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었다. 그 후 없던 물욕이 더 없어졌다. 짐을 늘리지 않고 꼭 필요한 좋은 것만, 경제적 여유가 안된다면 조금 더 기다렸다 구매하는 습관을 지키려고 노력했었다. 덕분에 가구들과 짐들이 내 스타일대로 일정한 톤으로 유지되고 집이 복잡해지지 않는다. 거실의 나무 탁자도 거의 10년째 쓰고 있지만 오히려 더 멋스러워진다.
좋아하는 스타일의, 소수의 짐 만으로 한 단계 넓은 평수로 이사하다보니 오히려 카페 같고 좋다. 예전 집에서는 가끔 집중하기 어려워서 카페를 가는 선택을 하곤 했었지만 지금은 집이 더 카페같고 집중이 잘 된다. 테이크아웃 하러 가기 귀찮아서 커피머신을 사야하나 라는 생각도…
집안일(?)을 더 많이 하게 된 점도 신기하다. 집에서 안정감을 느끼다보니 일정이 없는 날 식사시간에 배달 앱을 켜고 한참을 쳐다보거나 예전 집 근처의 국밥집, 김밥집, 햄버거집을 헤매던 패턴이 없어졌다. 먹는 것에 대한 욕심이 있어서 어떻게든 맛있는걸 먹으려고 용을 쓴다. 그러다 보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거나 애매한 시간에 식사를 하게 되서 하루 패턴이 깨지고 시간이 낭비되곤 했다. 혹은 2인분만 되는 식당이라 굳이 친구를 불러서 먹어야 할 때도 있었다. 지금은 주방도 넓어졌고 바람도 잘 통해서 그런지 간단한 음식을 해 먹는게 더 편하고 맛있다. 천천히 밥을 먹고 일어나서 식기들을 치우고 설거지하면 간단하지만 ㅎㅎ 맛있는 요리를 했고 정리도 했다는 생각에 뿌듯하고 마음도 맑아진다.
덕분에 청소나 옷 정리도 더 칼같이 할 수 있게 되었다. 정돈된 상태를 더 유지하고 싶어서 졸릴 땐 괜히 밀대로 집을 닦아보고 런드리고에서 온 빨래를 카테고리화 해서 알맞은 자리에 넣는다. 기존 집에서는 졸릴 때 넷플릭스나 유투브를 보면서 시간을 때웠던 것을 생각하면 훨씬 생산적이다. 빨래의 경우도, 기존 집에서는 공간이 많지 않아서 옷을 거의 분류할 수 없고 쌓아놨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붙박이장들이 조금 더 있어서 세분화된 분류가 가능하고 옷을 쌓아놓지 않아도 된다 (예: 반팔 상의, 긴팔 상의, 운동 상의, 운동 하의 등..). 결과적으로 출근할때 옷을 뒤적거리는 횟수나 고민하는 시간이 줄어서 훨씬 덜 복잡하고 그만큼의 효율성이 확보되었다.
산책을 해도 조용해서 좋다. 이사온 후 동네를 많이 돌아보지 못했다는 생각에 주말엔 종종 산책이나 러닝을 했다. 근처에 절도 있고 명상길 같은것도 있어서 꽤 괜찮다. 산책로에는 사람이 많지 않고 관광지나 유명한 카페 혹은 음식점이 없어서 역설적으로 주말이나 휴일엔 훨씬 더 조용하다. 생각을 더 잘 정리할 수 있다.
숨은 맛집이 많은지는 아직은 모르겠다. 최근엔 일정이 없을때 집에서만 기거(?)한 덕분에 커피 맛이 좋은 카페 이외에는 많이 알아본 것이 없다. 새로운 동네에 온 만큼 당분간 친구들과는 동네에서 보자고 하고 맛집들 도장깨기도 천천히 해 봐야지. ㅎㅎ
아직 몇십억 단위나 몇백억 단위를 가져보진 않았다. 그럼에도 거주 환경은 지금으로 충분하다. 적어도 현재 나의 생각은 이렇다. 더 많은 부를 위해 가야할 필요가 있을까. 만약 뭔가 더 있어야 한다면 아직은 대출로 인해 포기한 테슬라 혹은 포르쉐 카이앤 (혹은 진짜 좋은 로봇청소기)정도 일것 같다. 이러고 더 있다보면 욕심이 생기겠지..? 환경이 개선된만큼 뾰족하게 집중하고 여유롭게 굵직한 생각들도 더 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만큼 큰 기업을 일구어내겠다 다짐해 본다.
오늘 하루에 감사한다.